S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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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레의 가장 오래된 주거 지역은 기원전 8세기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폐허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고대 건축물에서 발견된 돌 유물들은 이 지역이 그 때 당시 프리기아 인구에 의해 주거지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 도시는 에페소에서 코냐, 그리고 이어서 아시아 마이노르까지 이어지는 로마 왕의 길에 놓인 중요한 정거장으로 여겨졌으며, 성 바울 또한 아나톨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이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기원후 4세기에는 에페소가 수도로서의 중요성을 잃었지만, 이스탄불은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코냐는 순례자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정거장으로 남았습니다.

실레에서 반드시 방문해야 할 명소 중 하나는 컨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지은 아야 엘레니 교회입니다. 헬레나는 최초의 기독교 귀족으로, 그녀의 평생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기 위해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그 길에 그녀는 이 교회를 비롯하여 다양한 교회들을 세워 그녀의 믿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실레의 역사는 기원전 8세기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프리기아 주민들의 고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실레가 에페소에서 코냐로 가는 왕의 길의 중요한 정거장으로 여겨졌고, 성 바울 또한 아나톨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이 지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071년 터키 셀주크 가서(시리즈)가 코냐를 점령한 후, 많은 비이슬람 가정들이 도시를 피해 실레로 이주했으며, 이주한 가정들이 실레에 적절한 위치때문에 정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쿠르살 군단의 코냐 침공 이후에, 킬리자르슬란 1세턴이 1097년에 실레의 주민들을 마을에서 대피시키고 산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쿠르살 군단은 이후 코냐와 실레를 모두 점령하였습니다.

그 시기의 기록들에 따르면, 알렉시오스 1세가 1116년에서 1118년 사이에 코냐에 들어갈 때 군대를 돕던 많은 그리스인들은 최종적으로 이스탄불로 돌아갔으며, 비이슬람 인구가 감소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비잔티움의 마누엘 황제는 1146년에 필로멜리온(액세히르) 근처의 전투에서 셀주크 술탄 메수드를 격파한 후 코냐를 포위하였으며, 비잔티움 군대는 코냐의 교외를 불태웠습니다.

1153년의 역병 발생과 같은 다양한 자연 재해도 코냐의 인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찰스 텍시에가 이 지역을 방문하고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들의 여름 주택들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20세기 초에는 재무부와 토지 등기부의 기록에 따르면, 실레의 주민 중 56%가 무슬림이었고, 44%가 비이슬람인이었습니다. 그러나 1923년 이후에는 실레의 기독교 인구가 인구 교환 때문에 그리스로 이주하였습니다.